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쇼와 시대 (문단 편집) == 개요 == '''昭和(しょうわ)''' [[1926년]] [[12월 25일]]부터 [[1989년]] [[1월 7일]]까지 [[일본]]에서 사용된 [[연호/일본|연호]]이자 [[시대]] 구분이다. '쇼와'는 [[쇼와 덴노|히로히토]]가 제124대 [[천황]]으로 재위하고 있을 때 사용한 연호로, 일본 역사상 최장기간 사용되었다. 연호의 의미는 ''''국민 평화와 세계 각국의 번영 및 공존 기원'''', 한학자 요시다 마스조우가 고안해낸 것으로 《[[상서|서경]](書經)》 2장 우서(虞書) 요전(堯典)[* [[요(삼황오제)|요 임금]]의 업적을 다룬 부분]의 백성소명 협화만방[*원문 克明俊德 以親九族 九族卽 平章百姓 百姓昭明 協和萬邦 黎民於變時雍 큰덕을 밝히시어 구족을 화목하게 하셨고 구족을 화목하게 하시니 백성이 밝게 다스려졌고 백성이 밝게 다스러지니 온세상이 화평하게 되었다.]('百姓'''{{{#green 昭}}}'''明, 協'''{{{#green 和}}}'''萬邦 : [[백성]] 각자의 덕이 밝혀짐에 따라 모든 나라가 협동 화합하고 백성이 크게 변하여 화합한다.')에서 유래했다. 여담이지만 고사쿠라마치 천황, 고모모조노 천황의 재위 기간[* 1764~1772]에 쓰인 연호 메이와(明和)와 개원이 같다. 연호 선정과정은 선대 덴노인 다이쇼 덴노의 과정과 비슷하게 3번의 선정과정이 있었다. 궁내성측에서 1차로 제출된 후보로는 쇼와(昭和), 진카(神化), 겐카(元化), 진카(神和), 도와(同和), 게이메이(継明), 준메이(順明), 메이호(明保), 간안(寛安), 겐안(元安) 등이었다. 궁내성측에서 2차로 추려낸 후보로는 쇼와(昭和), 진카(神化), 겐카(元化), 진카(神和), 도와(同和) 였다. 3차 후보로는 쇼와(昭和), 진카(神化), 겐카(元化) 였다. 이때 내각에서 후보군을 제출하는데 류세이(立成), 데이교(定業), 고분(光文), 쇼메이(章明), 교추(協中)가 각각 후보군으로 등재되고 이에 내각과 궁내성이 회의를 거쳐 마침내 쇼와(昭和)로 결정하되 겐카(元化), 도와(同和) 가 참고로 올라가고 최종적으로 쇼와로 결정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오보사건이 발생하는데 다이쇼 덴노가 사망한 직후인 1926년 12월 25일 동경일일신문에서 연호가 고분(光文)으로 결정되었다고 호외판 기사를 냈는데 이후 궁내청 정식발표는 쇼와로 발표하면서 편집주간이 사임하는 일이 벌어진다. 일명 광문사건이라고 하는 오보사건이다. 이 때문에 기존 결정된 연호는 고분이었지만 연호가 미리 공개되어버려 궁내성 측에서 쇼와로 급하게 바꾸었다는 의혹이 한동안 제기되었고 궁내성은 회의록을 공개하며 이러한 의혹을 일축해왔다. 앞서 보았듯 쇼와는 궁내성의 첫 후보군 제시때부터 쭉 후보군에 있었던 후보였으며 고분은 내각 후보군 늦그늘막에 제시된 후보였다.] 昭和로 쓰고, 전각 [[문자]] 한 글자 공간에 넣으면 {{{+2 ㍼}}}이다. [[한국 한자음]]으로는 '소화'이다. 64년 동안 사용된 연호이지만, 쇼와 원년([[1926년]])과 64년([[1989년]])은 각각 일주일 정도만 사용되어 실제 기간은 62년 13일이다. 연호를 [[서력]](西曆)으로 바꾸려면 쇼와 연호 n년에 1925를 더하면 된다. 쇼와 연호는 [[일본 제국]]의 침략전쟁이 한창이던 쇼와 10년대가 [[1935년]]~[[1944년]]이듯 [[메이지 시대|메이지]]와 함께 서력기원에 바로 대입해서 적용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 그나마 5년 단위로 딱딱 끊어지기에 쇼와 ↔ 서기 연도 계산은 [[메이지 시대|메이지]]나 [[다이쇼 시대]]보다 쉬운 편이다. 사실 이런 문제는 [[일본]]뿐만 아니라 [[연호]]를 사용해 온 동양사 전반에 걸친 문제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